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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고백19

2박 3일 연립주택에 사는 동안에도 여전히 나의 장난끼와 사고 기질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인가를 저지르고 혼날까 봐 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제 기억으론 그 당시 개교기념일과 연휴가 겹쳐서 5일간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때였습니다. 아무튼 집에 들어오면 죽을 줄 알라는 어머니의 엄포에 집에 안 들어갔는데 이미 여러 차례 집에 안 들어가고 외박을 한 경험도 있고 어머니의 엄포에 약간은 반항심도 생겼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죽기 싫어 안 들어갔다고 어깃장을 놓을 요량으로 집 주변을 맴돌면서 집에는 안 들어가고 어머니의 약만 살살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 밥을 먹을 시간이 되었음에도 저를 부르거나 찾으러 나오는 식구들이 없었고 더 어두워지자.. 2021. 1. 26.
약수터 새로 이사간 연립 주택은 주변에 산이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난곡이라는 동네는 관악산 줄기로 동그랗게 원형으로 둘러선 모양이었고 연립주택 주변도 장군산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었습니다. 장군산에는 약수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제가 어렸을 때에는 물을 담아 가기 위해 3-4시간씩 물통을 놓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당시 저의 제1임무는 집안에 식수가 끊이지 않도록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막내인데다 공부에 그다지 취미가 없었던 터라 그일을 도맡아 하기도 했지만 제 자신도 물을 길어오는 것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약수터로 가는 산길에는 졸졸 흐르는 냇가가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그곳에서 친구들과 위아래로 흙을 쌓아 댐을 만들어서 아래 댐을 터트리는 놀이를 하였고 겨울이면 추.. 2021. 1. 22.
연립주택 양희네로 불리던 집에 불을 낸 연유로 그 집에서 이사를 가야 할 상황에 처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이 참에 세 사는 것은 그만 두고 집을 장만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건너편 동네의 상당히 외진 쪽으로 지금의 미성 중학교가 있는 부근의 연립주택을 사서 이사를 하셨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에서 때였고 그 집이 제가 태어나서 두 번째로 가져본 우리집이었습니다. 그 연립주택은 10미터 정도의 축대 위에 2층 구조로 세워져서 상당히 높은 집이었습니다. 1층에 우리집이 있었는데 부엌으로 연결된 뒷문을 열면 축대 밑으로 건축 자재를 쌓아놓은 공터가 있었고 옆으로는 가파른 산이 있어서 부엌문과 대문을 열어 놓으면 정말 여름에 선풍기 없이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었습니다. 연립주택이다.. 2021. 1. 19.
회초리와 촛불 초등학교 4학년, 여전히 양희네 집에 세 들어 살 때였습니다. 그 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마당 있었고 왼쪽으로 꺾어 3미터쯤 가면 두어 계단 위에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었고 오른쪽으로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방 안에는 집주인의 거실로 나가는 문이 있었고 그 문 왼쪽에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방에는 다락으로 올라가는 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때 잠깐이었지만 시골에서 올라오신 친척 아저씨 한 분과 형이 작은 방에서 생활하고 저는 안방에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가끔 형 방에 들어가보면 형의 다이어리 같은 책에 맨날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글을 멋들어지게 써 놓았고 잃어버린 형이나 죽은 형에 대한 책임감 같은 글들을 적어 놓.. 2021. 1. 15.
코골이 저는 코골이가 심한 편입니다. 피곤하지 않으면 골지 않는다고 하는데 피곤하면 심하게 고는 편입니다. 어려서도 가끔 코를 골았는데 어린 저는 코를 곤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저는 집안에서 골칫거리였고 그날도 왜 집에 못 들어가게 됐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뭔가 사고를 친 것은 같은데 제 기억 속에는 잘못한 기억은 없고 오래도록 잊지 못할 한순간이 사진처럼 머리 속에 각인되었습니다. 아무튼 아버지가 제게 돌을 던지신 이후로 걸핏하면 집에 안 들어가는 버릇이 생긴 것은 분명합니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같은 학년의 친구 둘이 살고 있었는데 둘 다 가정 형편이 좋았고 또 같은 골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셋이서 자주 어울려 놀았습니다. 셋이 잘 놀다가도 때때로 두 녀석은 잘 산다고 지들끼리 놀았.. 2021. 1. 12.
초능력 농심에서 만든 과자 중에 B29라는 과자가 있습니다. 한참을 안 나오다가 다시 잠깐 보였다가 요새는 또 안보이는 과자인데 한동안 이 과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돈만 생기면 이 과자를 사먹기 위해 수퍼마켓으로 향하곤 했습니다. 사실 집이 그리 풍족하지 않았고 정해진 용돈도 없이 어쩌다 주시는 돈으로 사먹다 보니 그 좋아하는 과자를 자주 사먹지 못했습니다. 제게 용돈 주시는 걸 기쁨으로 아셨던 아버지께서도 저금통을 털어먹은 이후로는 일절 돈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내 주머니는 늘 빈털터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정말 농심의 그 과자가 그렇게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길을 걷다 '저 나무 아래 돈이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무심코 그 나무 주변을 둘러보는데 500원짜리 지폐 하.. 2021. 1. 8.
기절 자전거 사건이 지난 얼마 후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어렸을 때 가장 창피했던 기억을 꼽으라면 아버지한테 혼나고 팬티만 입은 채로 집 밖으로 쫓겨난 일입니다. 하도 사고를 많이 친 까닭에 그때 무엇을 잘못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튼 한 차례 타작이 끝난 후에 아버지는 저를 팬티만 입힌 채로 대문 밖으로 끌어내셨고 문을 잠근 채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주위는 깜깜했지만 초저녁이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나가며 저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척이나 창피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창피하여 빨리 집에는 들어가야겠는데 담을 넘고 싶어도 담 위에는 도둑을 막기 위해 깨진 병 조각들을 길게 심어 놓은 상태였기에 담을 넘을 생각은 할 수조차 없었고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일.. 2021. 1. 5.
자전거 저금통 도둑질에 성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더 큰 대도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예닐곱 살에 셋째 형과 함께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는데 그때 당시 자전거는 제가 제일 가지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우리집 형편에 자전거는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한 물건이었습니다.초등학교 3, 4학년이 되기까지 아버지가 사주신 장난감은 장총을 본떠 만든 플라스틱 총뿐이었습니다.앞에 실이 달려있는 마개를 끼우고 방아쇠를 당기면 공기에 의해 뽁 하고 마개가 발사되는 총이었습니다.그런 것에 비하자면 자전거란 엄두도 낼 수 없는 물건이었고 공부도 못하고 집안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던 제가 사달라고 요구하기에는 더욱 어려웠습니다.아주 잘 사는 친구들 중에 자전거를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 있기는 했지만 .. 2021. 1. 1.
저금통 초등학교 3학년인지 4학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에 살던 곳 부근으로 조금 큰 집에 이사를 했는데 저보다 한 살 어린 집주인의 딸의 이름이 양희인 까닭에 양희네집으로 불리우던 집이었습니다. 그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께서 뒤주 모형의 나무로 된 저금통을 사다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싸구려 플라스틱 재질의 빨간 돼지 저금통에 한자로 복자를 써넣은 저금통이 유행이었는데 그런 싸구려 저금통과는 차원이 다른 목재로 만들어진 꽤 멋있는 저금통이었습니다. 이 뒤주 모형의 저금통에는 앞에 자그마한 자물쇠가 달려 있었고 아버지는 거기다가 백 원, 이백 원 때로는 오백 원짜리 지폐도 가끔 넣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백 원짜리 과자도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2020. 12. 29.
친구 간혹 지난 어린 시절들의 친구들이 생각이 납니다.그들과 뛰어 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어린 친구들의 모습이 아련히 기억이 납니다.제가 제 머릿속에 친구로 가장 먼저 기억하고 있는 녀석은 윤성욱이라는 녀석입니다.이 친구와는 그 당시에 유행했던 과외 공부방에서 만났습니다.이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는지 4학년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 과외 공부방은 성욱이의 이모부님이 운영하던 과외 공부방이었습니다.물론 우리 집안이 넉넉해서 과외를 시킨 것이 아니라 공부에 영 관심이 없고 성적이 저조했던 저를 위해 어머니께서 특별히 거금을 투자해서 과외 학원에 보내신 것이었습니다.아무튼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 서로 알게 되었고 그렇게 친구가 되었습니다.6학년이 되어서야 한 반이 되었지만 이미 우리는 그 이전부터.. 2020. 12. 22.
그리움 형은 떠나고 나는 남았습니다.형이 떠난 자리에 형이 쓰던 물건들과 여름방학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리고 미처 반납하지 못한 파브르 곤충기라는 책만 제 곁에 남았습니다.제 오래 전 기억으로도 참 한 인물 하였던 형이었습니다.어머니가 아프다고 앓아 누우면 그 작은 손으로 매운 양파를 까며 하나도 안 맵다고 어머니를 도와주던 형이었습니다.그때는 죽음이 무엇인지, 그리움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던 때였습니다.다만 형이 없다는 사실과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 형이 나와 함께 가자 할 때 내가 말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서서히 그리움 속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장난꾸러기이며 여전히 사고뭉치였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혼자 있을 때면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함께 그리움이 밀.. 2020. 12. 18.
죽음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이때는 9살 인생에 엄청난 사건을 맞이한 때입니다. 고향이 개성이었던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남으로 피난을 하기 위해 임진강을 건너는 배에 태워지고 할머니가 잠시 짐을 가지러 간 사이 배가 떠나버려 할머니와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혼자가 된 아버지에게 가장 가까운 가족은 함께 배를 타고 건너온 고모님이었습니다. 제게는 고모할머니신 그분은 경기도 연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미 고인이 되셨고 거의 왕래를 하지 않는 집안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제 나이 9살 국민학교 2학년 여름 방학에 고모할머니가 계시는 연천으로 놀러갔습니다. 그때 큰 형은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함께 가지 않았고 저와 세째 형 둘만 가게 되었습니다. 연.. 2020.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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