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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살이/내 집을 찾아서

01 우리 집 세 살이

by +소금 2014.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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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우리 집 세 살이




2014년 6월 14일 토요일에 어쩌면 앞으로 평생 살게 될지도 모르는 곳에 집을 계약하고 왔습니다. 결혼 후 거의 대부분을 전세로 전전했던 우리 부부에게 집을 산다는 것은 인생에서 큰 결단 중 하나였습니다. 계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간 집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일들과 또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에 대한 이야기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결혼식을 올린 때는 제 나이 30세이고 아내의 나이 27세였던 가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돈도 없었고 아직 학생의 신분이었는지라 아버지의 집에 얹혀 살아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집은 제 나이와 거의 비슷한 오래되고 낡은 단독주택이었고 대문을 들어서면 세를 주기 위한 작은 부엌과 방 하나와 그것보다 조금 큰 부엌과 방 하나가 서로 붙어 있고 그 옆으로 우리가 살던 본채가 있는 짧은 “ㄱ”자 형태의 집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그 집은 제가 태어나고 난 후 아버지 명의로 소유한 두 번째의 집이었습니다. 그 집은 난곡이라는 신림동에 위치한 집이었는데 그 집을 살 때 가격이 3천 만원 조금 넘었었는데 최근에 팔 때에는 2억이 넘었으니 아버지가 많이 버실 때 그 동네 땅만 더 사셨더라도 아마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변의 사람들이 말하곤 했습니다. 

아무튼 결혼 전에 세를 주었던 두 개의 셋방을 수리하여 작은 방 쪽을 부엌으로 만들고 큰 방 쪽을 부엌을 터서 더 큰 방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 방을 그렇게 수리한 것은 형이 결혼할 당시에 형과 형수를 그곳에 살게 하려고 수리한 것이었는데 형과 형수는 직장이 가까운 안산으로 집을 얻는 바람에 한동안 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결혼하기 얼마 전부터 제가 생활하다가 결혼을 준비하면서 그 곳을 신혼방으로 꾸몄고 그곳은 아내와 저의 신혼집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도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던 저는 경제능력이 없었고 다만 스스로 학비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생활비를 댈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 당시 본채에 사시던 부모님과 거의 살림을 따로 했기에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신혼 생활을 꾸려나갔고 매달 10만원씩 월세라고 해야 할지 용돈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애매한 금액을 아버지께 드리며 신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내는 제 형편을 다 알고 결혼을 한 것이지만 정말 속으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그지없었습니다. 저하나 보고 결혼을 한 것이지만 그나마 아파트 전세라도 얻었던 형에 비하자면 우리의 신혼집은 욕실은 고사하고 화장실도 집밖에 있었고 그나마도 좌변기가 아니라 양변기 형태에 물을 바가지로 퍼부어야 하는 화장실이라 결혼 전에 이런 집에 살지 않았던 아내가 겪었을 불편함은 상당히 컸을 텐데도 별로 불평을 하지 않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욱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그 해 겨울을 보내고 1년을 넘겨 다시 겨울이 찾아왔을 때 보일러가 속을 썩이기 시작했습니다. 수명을 다한 보일러가 밤에 꺼지는 바람에 자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보일러의 전원을 껐다 다시 켜면 좀 작동되다가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꺼지기를 반복하여 보일러 기사를 불렀습니다. 보일러 기사는 너무 오래되고 낡은 탓에 수리를 하려면 차라리 새것을 사는 것이 낫다고 하여 아버지와 상의를 드렸지만 아버지는 보일러에 대해서는 네가 알아서 하라고만 하시고 외면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새 보일러의 가격이 당시에는 50만원이 넘었는데 새 보일러를 사기에는 우리의 형편이 어려웠기에 아버지의 지원을 바란 것이었는데 결국 여러 날 밤을 못 자고 보일러를 껐다 켰다 반복하며 고생을 하고서야 아버지의 도움을 포기하고 결국 우리 돈으로 보일러를 교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너희들이 내는 10만원으로는 부족하다며 5만원을 올려 15만원을 내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학교를 마칠 때까지만 유보해 달라고 당부를 드렸지만 아버지는 올려주든가 나가든가 하라는 매정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아버지는 이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아버지의 그런 삶의 자세는 아버지가 과거 장의차를 운전하시면서 고인의 사후에 가족들 간에 재산 분쟁으로 싸움을 목격하시면서 가족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오직 돈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갖게 된 삶의 자세였습니다. 아버지의 그런 삶의 자세는 가정 내에서 형이나 어머니 또는 제게 많은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아버지한테 5만원을 더 드리는 것이 전세보증금조차 없었던 저와 제 아내에게는 현실적이면서 경제적인 방법이었지만 저희는 새 집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제가 아버지의 집을 나오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저녁이면 퇴근한 아내를 붙들고 한 시간이 넘도록 당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로 푸념을 늘어놓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퇴근해서 저녁도 먹지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아버지 방에 불려 들어가 푸념을 듣는 일이 잦아지면서 저는 집을 나갈 결심을 굳히게 되었고 몇 차례 아버지와의 언쟁을 끝으로 이사를 가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이사 갈 전셋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 남편(냥이 주인)이 쓴 타향살이 이야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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